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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행차길 주요 유물 유적

창덕궁
창덕궁 사진
1405년(태종 5년)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비원으로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그 빼어난 풍광으로 이름이 높다.
숭례문
숭례문 사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며 원래의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다. 1394년(태조 4) 창건되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霓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2008년에 2월 10일 방화 화재로 석축만 남긴 채 누각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소실되었다. 5년여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준공·공개되었다.
노량행궁(용양봉저정)
노량행궁(용양봉저정) 사진
정조15년(1791)에 지어진 행궁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 참배길에 한강을 건넌 후 점심을 들면서 잠시 휴식하던 곳이다. 건조연대는 1789년(정조 13) 이후로 추정되며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인 온돌방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툇간을 붙였으며, 사방에는 띠살 분합(分閤)을 단 기와집 한 채만이 있다. 이곳은 잠시 휴식하며 점심식사를 하던 곳이라 하여 일명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다.
과천행궁(온온사)
과천행궁(온온사) 사진
경기도 과천시 관문동에 있는 조선시대 왕이 쉬어가던 객사로 1650년(인조 27) 축조되었다. 《과천현 신수읍지》에 따르면 현감 여인홍이 동헌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인 현륭원으로 참배하러 갈 때 이곳에서 쉬었다. 과천 객사에서 머물 때 주위 경치가 쉬어 가기 편안하다 하여 ‘온온사(穩穩舍)’라는 현판을 내렸다 한다. 정조 즉위 초에 과천대로를 따라 능행차를 할 때 이용되었다.
시흥행궁
시흥행궁 사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 5동에 남아 있는 행궁 터로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 5동 831번지 6호 부근으로 추정된다. 1794년(정조 19)에 경기감사 서용보가 왕의 능행을 위하여 시흥에 행궁을 설치하였다. 행궁의 규모는 114간이나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금천현은 시흥현으로 개칭되었다. 현재 이곳에 행궁은 없어지고 그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수령 830년 된 은행나무 세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그 인근에 ‘동헌관아자리’표석이 있다. 이 동현을 행궁으로 이용하였다.
만안교
만안교 사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교. 나무다리는 홍수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고 매년 다시 가설하는 번거로움이 많아, 영구적인 돌다리로 다시 놓게 되었으며 정조 임금이 '만안교'라는 이름을 지었다. 전체적으로 축조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무지개다리로 평가된다.
안양행궁
안양행궁 사진
만안교를 가설하기 1년전인 1794년, 안양리(安養里)에는 안양주필소(安養駐畢所)가 당시의 경기감사 서용보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원래 주필소란 임금이 쉬어가기 위한 용도로 마련된 건물로 왕의 숙박을 위해서 만들어진 행궁(行宮)과는 구별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행궁이라고 혼용해서 부르고 있다. 원행정례에 따르면, 안양행궁은 대청과 방의 비품 7종, 종이와 기름을 합쳐서 7종, 방석 4종을 합쳐 도합 3개 항목 16종의 비품을 항시 비치할 것을 예시하고 있다. 이곳은 수리산 끝자락으로 예로부터 밤나무 숲이 무성했던 곳으로 평촌들과 관악산이 잘 보이는 풍광이 좋은 곳이다. 정조대왕이 쉬어갔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주접동(住接洞)이 되었다.
사근행궁
사근행궁 사진
의왕시 고천동 272-2번지 전 고천동사무소 내에 자리 잡은 사근행궁터는 정조가 돌아가신 아버지 장조의 능을 참배하러 가는 행차길에 잠시 쉬어가던 곳이다. 1760년 사도세자가 온양 온천에 행차할 때 이곳에서 쉬어간 일이 있었는데 효심이 지극한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서 부왕인 장조의 묘를 수원의 화성으로 이장하던 1789년 10월 6일 상여가 이곳에 이르자 마중한 이 곳 노인들에게 경기감사로 하여금 쌀을 나누어 주게 하고 행궁을 지으니 이름을 사근행궁(肆覲行宮)이라 하였다.
지지대 고개
지지대 고개 사진
지지대고개는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가 되는 고개로서, 이 고개는 예전엔 미륵현(彌勒峴), 혹은 사근현(沙斤峴)이라 불렀으며 정조대왕이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할 때마다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이 고개에 오르면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화산이 보이는데 거기까지 가는 시간이 아주 더디게 느껴져서 ‘왜 이렇게 더딘가?’ 하고 한탄을 하였다고 한다.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환궁을 할 때는 이 고개의 마루턱에 어가를 자주 멈추어 오랫동안 부친의 묘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이 고개를 ‘느리게 느리게 넘어가는 고개’ 라는 뜻의 한자어를 써서 지지대 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수원 화성
수원 화성 사진
수원시 팔달구에 자리 잡은 조선 후기의 성벽. 길이 4,600보(5,520m), 높이 4.m ~ 6.2m이며, 면적은 약 1,300,000㎡이다.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하고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정약용이 설계하고, 채제공이 중심이 되어 당시 신기술을 총동원해 구축한 뛰어난 과학적 구조물이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화성행궁
화성행궁 사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에 자리 잡은 행궁(行宮). 한국의 행궁(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던 곳으로, 수원 화성 안에 있다. 위치는 팔달산 동쪽 기슭인데 1789년 처음 설치하였다가 화성을 쌓을 때 대규모로 확장하였다. 그 규모가 576칸이다. 두 번째로 큰 남한산성행궁의 270칸보다 300여 칸이 더 크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현륭원을 참배하러 올 때마다 머물렀고, 특히 1795년 을묘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열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화성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훼손되고 낙남헌(洛南軒)과 노래당만 남게 되었던 것을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수원시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복원공사를 시작하였고,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을 완료한 1단계 공사가 끝나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화령전
화령전 사진
화령전은 1801년(순조 1) 순조가 선왕인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유덕을 길이 받들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화강석 기단 위에 세워진 익공(翼工)집이다.

정전 안에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고 해마다 제향을 드렸으며 ‘운한각(雲漢閣)’이라는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친필이었다. 1908년 정조의 어진이 덕수궁 선원전으로 이전되면서 기능이 축소되었다.
수원향교
수원향교 사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향교.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수원향교는 원래 고려 원종 22년에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세워졌던 것을 조선 정조 때 수원성곽을 축성하면서 현재 이곳으로 옮겨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文廟) 공간에는 대성전 좌우에 서무와 동무를 배치하여 공자, 맹자 등 중국의 현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인의 위패도 봉안하였다. 석전은 해마다 음력 2월, 8월의 첫 번째 정일 11시에 행하며 분향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 월 2회 10시에 한다.
용주사
용주사 사진
일제강점기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였는데, 이곳은 원래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세운 갈양사(葛陽寺) 자리였다. 952년(고려 광종 3)에 병란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조포사(造泡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여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으로 하여금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사(創寺)와 동시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융릉(정조 임금 당시에는 현륭원)
융릉(정조 임금 당시에는 현룽원) 사진
정조(正祖)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그의 비 경의왕후(敬懿王后, 혜경궁홍씨)의 능.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1에 있다. 근처에 있는 정조의 건릉(健陵)과 함께 동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능은 원래 경기 양주군의 배봉산(拜峰山)에 조성되어 영우원(永佑園)이라 하였으며 이를 지금의 화산(花山) 기슭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고종황제 때 융릉으로 능호가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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