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home 역사이해 정조대왕 소개

정조대왕 소개

정조대왕
1752(영조 28)~1800(정조24) 
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6~1800

1.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즉위

정조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조(莊祖 : 일명 사도세자. 고종 때 장조로 추존)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를 비(妃)로 맞았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었으며, 1762년 장조가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뒤주에 갇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일찍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정조는 즉위하자 곧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였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나아가 정조의 총애를 빙자하여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함으로써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2. 문화정치 추진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을 대제학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세손 때부터 추진한《사고전서 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을 새로 만들어 《속오례의》,《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등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3. 탕평책의 계승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정조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당쟁으로 얼룩진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으며,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4. 중인문화의 장려와 문예부흥

정조는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종장(宗匠)인 박지원의 제자들, 즉 서얼 출신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을 등용함으로써 그 사상을 수용하였다. 또한 정조는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하여 나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하여 귀족문학 중심으로 성립되어 온 한문학의 시대에 중인(中人)이하 계층의 문학도 적극 지원함으로써 중인문화를 꽃피웠다.

5. 문화사업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이밖에도 《일성록 日省錄》의 편수,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의 편찬,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형정(刑政)의 개혁,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의 폐지, 《자휼전칙 字恤典則》의 반포, 《서류소통절목 庶類疏通節目》의 공포,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의 폐지, 천세력(千歲曆)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通共政策)의 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치 문제로 되고 있던 서학(西學)에 대하여 정학(正學)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것이다.

6. 장헌세자(사도세자)에 대한 예우

한편, 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 문제에도 고심하였다.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면하여야 하는 갈등을 겪었다.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후에 고종 때 장조로 또 한차례 추존) 하면서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지위를 올렸다(고종 때 융릉으로 능호가 더 격상됨). 그 인근의 용주사를 중창하여 원찰(願刹)로 삼기도 하였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