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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과 정조대왕

동국여도(東國輿圖)』 중 『기전도(畿甸圖)』, 『화성성역의궤』중『화성전도』

1. 정조대왕의 효심과 수원

수원의 실질적 역사는 사실상 정조대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만큼 수원과 정조대왕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정조는 즉위한 지 13년만인 1789년에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拜峰山)에서 화산(花山)으로 옮기면서 삼국시대 이래 수원성(당시 토성) 아래 자리잡아 살던 안녕리 주민들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이주시켰다.

정조 17년(1793년) 수원을 화성으로 개칭하면서 원침인 현륭원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공양하는 고을로서의 체모를 높이기 위하여 유수부로 승격시키는 한편, 최정예 친위부대인 장용외영 군사들로 하여금 수원을 수비케 함으로써 군사적인 요새방어의 기능까지 함께 수행하도록 하였다.

2. 최첨단 신도시 수원

수원은 장조의 묘소인 융릉을 지키기 위해 조성된 신도시였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의 이유였을 뿐 더 깊은 내막에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과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목적 등 매우 다면적인 뜻이 수원 건설에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수원 건설에는 정조 당시의 최고급 인력과 최첨단 기술들이 총동원되었다.

지금 수원시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팔달산은 수원의 혈처(穴處)로 해당되는 곳으로, 정치 · 경제 · 군사 ·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은 충청 · 경상 · 전라도, 즉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육로 및 행상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는 서울을 지키는 남방의 요새였다.

3. 수원화성 건설의 숨은 뜻

정조의 수원화성 건설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목적을 띠고 있었다.
첫째는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수원을 군사요새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즉, 서울 북쪽에 남한산성과 대흥산성, 서쪽에는 강화도성과 문수산성, 동으로는 광주의 남한산성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허술한 남쪽 수비를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였으므로 이를 보완함으로써 확고한 방어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둘째, 수원에 인구를 모으고 경제를 발전시켜 대도회로 키우며, 행정상으로도 격상시켜 부수도(副首都)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려는 목적도 함께 있었다. 그래서 정조 17년(1793년) 수원부(水原府)를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키고, 이름도 수원에서 화성으로 바꾸었다. 화성과 더불어 서울 외곽에는 네 개의 유수부가 자리잡게 되었다.

정조의 꿈은 수원의 주민들이 집집마다 부유하고 사람마다 화락하는 낙원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자급자족하는 낙원도시는 다른 말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시이기도 했다. 정조는 수원을 이용후생의 도시로 만들기 위한 재원으로서 왕의 사유재산인 내탕금(內帑金)을 투자하고, 이를 이용하여 수원의 도시 주변에 모범적인 수리시설(水利施設)과 농장[둔전]을 건설하였다. 이로써 수원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범적인 농업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밖에도 수원 주민에게는 요역, 부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 주고, 주변 지방의 상인이나 장인(匠人)들에게도 여러 가지 혜택을 주어 수원에 모여 살게 함으로써 이곳의 상공업 진흥을 촉진시켰다. 이에 수원은 백성들이 살기 좋은 도시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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